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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김춘수의 꽃, 환상의 꿈터였던 어린 시절의 꽃밭

by #$%@#$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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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어린 시절 필자는 강원도 홍천에 있는 어느 작은 집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앞마당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화단에는 이름도 익숙한 여러 종류의 화초들이 있었습니다. 화단 맨 앞쪽에는 화단과 마당의 경계라도 이루 듯 채송화가 줄지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채송화는 분홍, 노랑, 보랏빛 등 다양한 색깔의 꽃들을 피웠습니다. 바로 뒷줄에는 봉숭아, 과꽃, 한련화 등이, 그리고 그 뒤에는 맨드라미, 백일홍, 백합 등이 있었고 꽃밭 한 켠에는 마당 한 가운데 등넝쿨를 올려 그늘막으로 만들어놓은 테라스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화단 가장자리에는 비교적 일찍 꽃이 피고 지는 개나리와 진달래 나무도 있었습니다만 다년생인 이 나무들은 키가 잘 자라는데다가 자리도 많이 차지하여 자주 잘라주어야 했습니다. 계절따라 화단은 다양한 색깔과 향기로 꽃잔치를 벌였습니다.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 여름이면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백일홍 등이 피고 지면서 화단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물에 젖지 않는 한련 이파리에 모인 물은 구슬처럼 굴러 다녔고, 봉숭아 꽃으로는 엄마가 딸의 손톱에 물을 들여주고, 무더운 저녁이면 마당 한가득 퍼져있는 백합 향기, 아침에 피었다 한낮이면 지는 나팔꽃, 저녁에 피었다 아침에 지는 분꽃, 눈을 즐겁게 해주는 다양한 색깔의 꽃들은 그야말로 흥겨운 꽃잔치였습니다. 밤이 되면 반짝이는 별들도 헤어봅니다.

화단은 오로지 꽃들만 모여 사는 독무대가 아니었습니다.  흰나비, 노랑나비, 부전나비, 호랑나비 등이 크고 작은 각종 벌들이 잉잉거리며 펼치는 연주에 맞춰 어지럽고 화려하게 춤추면서 각본 없이 벌이는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았습니다. 소리를 담당한 벌들과 춤을 맡은 나비들을 잡기 위해 화단 여기저기 처놓은 거미줄에는 아침 이슬이 맺혀 햇빛에 반짝입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가고 꽃과 곤충들의 향연이 저물어갈 때면 화단 한 쪽에 자리잡고 있던 국화가 노오란 꽃과 더불어 알싸하고 매캐한 향기를 차가운 아침 마당에 선사합니다. 

겨울이 오면, 계절 따라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안겨주고, 화단에서 생을 마친 화초들의 잔해에는 눈이 덮힙니다.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화단, 눈 속에 묻힌 환상의 꿈터, 꽃밭은 그렇게 삶의 의미와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의 눈물을 남기고 막을 내립니다. 

화초의 이름을 모친에게서 배우고 꽃이 주는 의미를 화단에서 얻었습니다. 모친은 또 그 모친에게서, 그 모친은 다시 그 모친으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거슬려 올라가면 그 시작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들을 부르는 것이 곧 이름이 되었더라]

 

꽃이 지고나면 꽃이 있던 자리에는 씨앗이 생겨납니다. 씨앗의 모양과 크기 또한 꽃만큼 다양합니다. 꽃들은각기 다른 정보들을 그 작은 씨앗에 담아서 생명을 이어갑니다. 

꽃이 그토록 아름다운 빛깔을 지니고 매혹적인 향기를 발하는 이유는 꽃가루받이를 위해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려는 데 있습니다. 벌과 나비는 꿀과 꽃가루를 모으고 꽃은 그것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멋진 기브 앤 테이크 아닙니까!

아! 꽃밭은 어린 시절 노닐던 마음의 고향이요, 환상의 꿈터였습니다. 각기 다른 모양과 이름을 지닌 꽃들과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게 해준 자연의 배움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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