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교향곡을 듣고 나니 운명 또는 운에 관해 떠오르는 구절이 하나 있다. 명심보감 순명(順命)편에 실려 있는 글이다.
때를 만나면 순풍이 등왕각으로 보내고
운이 없으면 천복비에 벼락이 떨어진다
시래풍송등왕각(時來風送滕王閣)이요
운퇴뢰굉천복비(運退雷轟薦福碑)라
당나라 때 왕발(王勃)의 꿈에 망당산의 신령이 나타나 그에게 등왕각으로 가라는 말을 전했다는 일화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등왕각까지의 거리는 7백리.
등왕각은 당고조(唐高祖) 이연의 아들 이원영이 강서성 남창현에 세운 누각의 이름이다. 이원영은 등왕이라는 작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각의 이름을 등왕각이라 불렀다.
후에 홍주태수 염백서가 누각을 크게 수리한 뒤 중양절(9월 9일)에 수리 기념으로 연회를 베플고 방문객들에게 등왕각에 걸맞는 글을 지으라고 했다. 염백서는 사위에게 의도를 알리고 글을 준비해두라고 일렀다. 사람들은 글 짓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왕발은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말대로 등왕각으로 가려 했지만 그가 꿈을 꾼 날은 9월 7일이었고 시간은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등왕각은 7백리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처럼 동력으로 가는 쾌속선이라면 모를까 바람의 힘으로 가는 배로 하루밤 만에 그곳까지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발은 일단 배에 올랐다. 이 어찌 된 일인가! 배에 오르자마자 마침 순풍이 불어와 왕발은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등왕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지은 글이 바로 저 유명한 등왕각서(序)다.
염백서는 왕발이 나타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겼으나 그의 글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다음의 글 두 줄을 보고는 편견을 버렸다.
저녁놀은 외로운 따오기와 함께 떠 있고
가을 강물은 높고 넓은 하늘과 한 색깔이다
염백서는 왕발의 글을 으뜸으로 뽑지 않을 수 없었다.
읽고 또 읽어도 이 글은 명문장 중에 명문장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산신령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전문(全文)을 다 싣기에는 너무 길고 마지막에 있는 두어 줄만 인용하고자 한다.
아아! 명승지는 흔하지 않고 성대한 잔치는 다시 있기 어렵다.
난정은 버려진 채로 있고 채택은 폐허가 되었구나!
이별에 임하여 이 글을 지어 올리게 된 것은
요행히 성대한 잔치에 참석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천복비를 깨뜨린 벼락
천복비는 강서성 천복사에 있는 비석이다. 원나라 때 마치원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당나라 때 명필가 구양순이 비문을 지었다고도 한다.
송나라 때 어느 가난한 선비가 있었는데, 천복비의 비문을 탁본해 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렵게 여비를 마련하여 먼 길을 달려갔다. 마침내 천복산에 도착한 그날 밤, 천둥 번개가 몰아치더니 공교롭게도 천복비에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가난한 서생의 꿈은 비석과 함께 사라지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내 인생사는 어떤가? 산신령과의 만남으로 행운을 얻을 수도 있고, 우리의 꿈을 깨뜨리는 벼락이 떨어질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운이거늘. 그것은 다만 하늘이 하는 일이니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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